서울에 사는 어떤이는 한 달 동안 광주와 부산을 오고 간다. 서울에 사는 또 다른 이는 한 달 내내 집과 30분 거리의 직장만 시계추처럼 오고 간다. 어떤 이는 주말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가서 드라이브를 하다가 온다. 신나는 여행길이다. 또 다른 이는 한달 내내 전국을 돌며 물건을 팔지만 그에게는 그 여정이 힘든 외근길에 불과하다.
이동은 자유일 수도 있고, 동시에 이동은 속박일 수도 있다. 이동에 담긴 각자의 사연은 쉽사리 알아낼 수 없지만, 어디로 다녀갔는지는 일단 그려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KT 휴대폰 위치데이터로 사람들이 각자 한 달간 다녀간 권역들을 겹쳐 그려봤다.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다녀간 곳들을 점으로 표시하면 위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점들을 온전히 포함하는 볼록다각형을 그리면 노란색 선이 된다. 이러한 도형을 컨벡스 헐(convex hull)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한 사람의 한 달 궤적을 컨벡스헐로 표현하기로 한다.
물론,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저 볼록다각형 안을 모두 다니지는 않았다. "볼록 다각형이 그 사람의 이동 범위를 가장 잘 표현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그렇게 정의하고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그려보겠다.
대전에 사는 사람이 한 달 동안 속초, 인천, 제주, 부산을 다녀갔다면 그 사람의 볼록 다각형은 거의 전국을 뒤덮게 된다. 삼척에 사는 사람이 동해안선을 따라서만 왔다갔다 했다면 그 사람의 볼록 다각형은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 되어버린다.
전국을 한 번에 그리면 거의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테니, 여기서는 시군구 거주자별로 나누어 그려보겠다. 시군구 거주자들은 매일 잠을 자는 장소가 시군구 경계 안에 있을테니 볼록다각형의 일정 부분을 공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거주지가 유사한 네 명의 이동 범위를 겹쳐 그리면 위와 같은 모양이 될 수 있다.
이제 다시 처음에 등장한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2020년의 어느 한 달 동안 서대문구 거주자들 각각의 이동 범위들을 겹쳐 그리면 위와 같은 그림이 나온다. 당연히 서울 근처에서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서울은 노랗게 타버렸다. 좁은 지역보다는 좀 더 넓은 광역 이동을 눈여겨보자.
이동의 범위가 비슷한 사람들이 선들을 굵게 만든다.
제주도를 오간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공항 근처에만 왔다갔나보다. 공항 근처에 진한 꼭지점이 생겼다. 그 꼭지점을 찍은 선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아마도 왼쪽 선은 김포공항으로 향해 있을 것이고, 오른쪽 선은 서대문구 어느 곳을 향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서쪽의 한림에서 남쪽의 서귀포를 거쳐 동쪽의 성산포까지 훑고 간 듯하다. 그렇게 그려진 볼록다각형들이 꽤 있다.
내륙으로 눈을 돌려보면 대전과 대구를 찍고 돌아간 사람, 부산과 경주를 찍고 간 사람들이 보인다. 아마 KTX를 타고 부산을 다녀간 사람들인 것 같다. 경주에 내리지 않았더라도 열차가 경주를 거쳐 갔을테니 경주를 돌아간 것처럼 그려진다.
서울에서 동쪽으로는 굵은 두 개의 도형들이 눈에 띈다. 하나는 강릉으로 뻗어가고 다른 하나는 양양으로 뻗어간다. 거의 고속도로를 타고 갈테니 한 쪽 선이 진한 것이 이해가 간다. 강릉에 간 사람은 양양까지 많이 올라가는 것 같다. 양양으로 간 사람들은 속초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친절하게 지도에 지명을 하나도 달지 못한 점 양해를 구한다)
이 글의 목적은 자세한 분석이 아니라 시각화를 통한 탐색이다. 한 장을 너무 오래 설명하면 취지에 어긋나는 것 같으니 이제 다른 그림으로 넘어가겠다. 수도권 확진자 급증으로 거리두기 4단계에 돌입하여 이동에 제약을 받으니 스크롤이라도 신나게 해보자.
그냥 갑자기 강원도 삼척시 거주자들의 이동 범위다. 울릉도도 좀 가고 해안선 따라 움직인 사람들이 꽤 된다. 배 타고 동해 바다를 누빈 사람들도 많겠지만, 바다 한가운데에는 휴대폰 기지국이 없으니 선으로 나타나지 못한 것 같다. 남서쪽으로는 잘 안가는데 서울 주변으로는 꽤 오간다.
이번에는 익산시 거주자.
국토를 절반으로 접으면 동쪽 절반에서는 익산 거주자들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남북 방향으로 많이 움직이는데, 여수에도 많이 간다. 제주도에도 의외로 많은데, 군산 공항에서 제주 취항 노선이 있기 때문이다. 군산, 익산, 전주 사람들은 군산 공항을 통해 제주에 꽤 많이 간다.
이번에는 안동시.
확실히 익산에 비해 제주는 덜 간다. 가기가 힘드니까 그렇겠지.
남서쪽은 잘 안다니고 동쪽으로난 영덕, 남쪽으로는 대구까지 많이 오간다. 이동의 범위는 주로 고속도로 연결망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고 고속도로를 따라 진한 선들이 많이 그려진다.
서울은 안동에서도 많이 오가는데 원주에서 한번 선들이 꺾인다.
옆 동네를 한번 볼까.
문경시
안동과 비슷한데 진하기가 많이 덜하다. 추정된 인구가 안동의 30% 정도라 그렇다. 서울은 멀지만 얼핏 봐서는 대구만큼 오가는 것 같다.
통영시 거주자
여기는 제주도를 많이 간다. 그런데 관광이 아니라 뱃길따라 어업인들이 많을 것 같다. 서쪽으로 돌아 흑산도까지 찍는다. 부산까지는 꽤 진하고 울산도 약간 올라간다.
서울은 어느 곳이나 줄기차게 오고가는 것 같다.
울릉군
아무래도 거주자가 적으니 선들이 좀 흐린데, 울릉도민 이동범위는 울진과 포항 정도가 많고 나머지 지역은 많지 않다.
보은군
3만명 정도라 궤적들이 상대적으로 별로 없지만, 대전과 청주는 거의 하나의 권역처럼 엉겨 있다. 누군가는 서남쪽의 대전으로 오가고, 누군가는 서북쪽의 청주로 오가는데, 대전과 청주를 동시에 오가는 보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동 반경이 매우 좁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쪽으로는 선들이 뻗어나간다. 이 쯤 되면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서울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광주광역시 서구
광역시답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까지 꽤 많은 곳들을 오가는 사람들이 있다. 재미있는 점은 몇 개의 뚜렷한 고리들이 나타난다는 점. 아까 보은에서도 청주와 대전을 동시에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했는데, 여기도 사정은 비슷한 것 같다. 여러 도시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선보다 서로 다른 하나의 지역들만 오고 간 궤적들이 보인다. '사람들 전체'는 다양하게 많이 이동하는데 한 사람만 놓고 보면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움직임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서울은 가는데 동쪽은 잘 안간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역시 광역시답게 주변으로 많이 움직인다. 경남 끝의 부산까지는 내려가는데 경북 끝의 울진 봉화쪽은 잘 안간다. KTX를 타고 대전~광명을 거쳐 서울역까지 많이 가는 것 같다. 서쪽으로는 남원, 구례를 거쳐 하동으로 궤적이 이어진다. 고속도로는 남원-구례-순천으로 이어지는데 궤적이 순천을 가지않고 하동으로 빠진 것을 보면, 섬진강따라 내려간 것 같다.
대전광역시 서구
광역시 중 가장 국토의 중앙에 가까운편이라 그런지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움직인다. 다만 강원도 쪽은 잘 안간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리니 그럴 것 같다.
세종특별자치시
대전 서구와 궤적이 비슷한데 또 다르다. 서울쪽으로는 오가는 사람들이 비슷한 것 같고 나머지 다른 지역들은 확실히 적다. 주변 지역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린 정도를 측정한다고 할 때 대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9년차에 다다른 세종은 아직은 서울과 좀 더 관계가 강한 도시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이 곳의 삶은 좀 다르다. 바다 위의 삶이다.
청주시흥덕구
아래 충주시와 비교해보자.
충주시
청주와 충주는 서로 멀지 않지만 이동 범위가 꽤 달라보인다. 청주 사람들은 동해안에 잘 안가는데 충주 사람들은 강릉까지 많이 간다. 반면 청주 사람들은 보령까지도 많이 가는데 충주 사람들은 서해안으로는 잘 가지 않는다.
영덕군
납작한 삶의 테두리들이다. 아마도 실제로는 동해안을 누비고 다닐테지만, 내륙쪽으로는 확실히 덜 간다.
여기까지는 전국을 의미없이 누비고 다녔으니 이제 약간 비교같은걸 해보자.
강남구 거주자 중 20대 남녀의 궤적을 비교했다. 숫자를 맞추느라 여성은 좀 덜 그렸다.
남자나 여자나 궤적이 비슷해보인다.
이번에는 강남구 거주자 중 40대 남녀의 궤적
이번에는 약간 다르다. 여성쪽이 부산방향의 이동이 확실히 덜하다.
같은 그림이지만 이번에는 여성끼리만 비교해보자. 강남구 거주자 20대 여성과 40대 여성
40대 여성이 더 많은데도 궤적은 덜 퍼져 있다. 아마 거주지 주변에 집중되어 있어서 그렇다. 부산 쪽도 확실히 덜하고 수도권 남쪽에서 대전쪽으로 뻗은 선들도 진하기가 덜하다.
이동하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나 비슷한데, 나이가 들면 여성의 경우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으로 발이 묶이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강남구의 40대 남성들이 피로감에 젖은 채 부산을 오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이동은 자유일 수도 있지만 삶의 속박일 수도 있다. 그 곳에 가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하지만, 어쨌거나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같은 지역에 살더라도 이동의 범위가 달라진다.
이번에는 똑같은 20대 여성인데 강남구 거주자와 장수군 거주자를 비교해봤다. 숫자를 비슷하게 맞추느라 강남구는 1%만 그렸다.
서울과 수도권이 교통이 잘 뚫려 있어서 주변을 더 많이 다닐 것 같지만, 서울은 집중되어 있는 영역이 좁고 오히려 장수군의 경우 서북쪽의 전주와 서남쪽의 남원으로 40km 가량을 오가는 궤적들이 많다. 장수군에는 대학이 없기 때문에 장수군에서 전주의 대학교로 통학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모두 다 대학을 다니는 것은 아니므로 직장이 남원이나 전주에 있을 수도 있고, 주말에 쇼핑을 가기 위해서 주변의 큰 도시로 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강남구는 그러한 삶의 필요들이 주변 10km 반경에서 해결이 되지만 장수군은 40km를 오가야 하는 것 같다. 이 때의 이동은 의무감이자 피로일 수 있다.
서울에서는 장수군에 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장수군에서는 서울을 오가는 20대 여성들이 꽤 많이 보인다.
이동의 범위는 곧 삶의 테두리이기도 하다.
삶의 테두리란 말 그대로 이동한 궤적이라는 물리적인 테두리일 수도 있고,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사회적 입지에 따라 혹은 사는 지역에 따라 저항을 받는 정도가 다르고 경험의 폭이 달라지는, 혹은 비슷한 경험을 얻기 위해 조금 더 시간을 쓰면서 움직여야 하는 그런 사회적 맥락의 테두리일 수도 있다.
이동 데이터는 말 그대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사람의 움직임이지만, 아니, 사람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지역과 지역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이만한 데이터도 없다. 주로 교통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던데, 사회학의 여러 분야나 도시 혹은 지역계획쪽에서도 충분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데이터 접근성이 높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 연구에 쓰인 사례나 정책에 밀착되어서 이용한 사례들을 많이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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